살아온 길

인간 성장현

제 고향 황전면은 전남 순천시내에서도 24km 떨어진, 토끼와 입 맞추고 사는 두메산골 열세집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7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농사를 대물림 하면서 살아왔으면서도 유년시절에는 세끼 밥을 먹고 사는 것도 어려워 굶기도 많이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피자, 치킨, 콜라, 햄버거에 길들여져 거들떠 보지도 않는 감자, 고구마가 고작이었지만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었던 그때가 가끔은 그립습니다.

국민(초등)학교 시절에는 겨울이면 서당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천자문, 사자소학, 명심보감, 논어를 읽었는데 그때의 서당공부가 살아가면서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호롱불 켜놓고 장가간 형님들이랑 한방에서 동문수학하며 함께 닭서리도 하고, 서당에서 땔 나무들을 공동으로 해 나르던 소중한 추억들도 예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즐겨했던 놀이는 깡통차기, 구슬치기, 숨바꼭질, 자치기, 딱지치기, 연날리기, 팽이치기, 썰매타기, 3.8선놀이 등이었습니다.


청소년시절

남들은 6년간 다닌 국민(초등)학교를 저는 7년이나 다녔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져서 재수를 했는데 처음으로 패배의 쓰라린 아픔을 배웠습니다. 1년 뒤에 순천 매산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공부를 잘하진 못했지만 다른 활동은 꽤나 열심히 했습니다. 학생회 규율부 활동도 했고, 제가 쓴 글이 교지에 실리면서 학교 대표로 시내 백일장 대회도 나가곤 했습니다.

중학교 때만 해도 꼭 법관이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마치 법관이나 된 것처럼 친구들의 다툼을 판결하기도 했던 그 시절에 인생의 대변화가 예고된 중요한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날도 평소처럼 수업이 끝나고 그냥 귀가했더라면 이런 변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벽에 붙은 대통령 후보 연설회 포스터가 제 발길을 순천 농업 전문 대학 (현 국립 순천 대학) 대운동장으로 이끌었습니다. 신민당 유진산 당수, 김수한 대변인 등의 연설에 이어 저녁 7시가 넘어 등단한 김대중 후보의 사자후는 운동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을 열광시키다 못해 거의 미치도록 만들었습니다. 김대중 후보의 일거수 일투족에 손발을 구르고 환호성을 지르던 청중 속에서 터질 것 같은 작은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어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녁을 굶었는데도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통학 열차를 놓쳐 집에 갈 수 없었는데도 아무 것도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법관이 되겠다는 작은 꿈(?)을 버리고 정치인이 되겠다는 큰꿈(?)을 막연하게나마 가슴에 새겼습니다. 정치를 하려면 말(연설)도 잘 해야 한다기에 고등학교때는 정식으로 웅변을 배웠습니다. 공부보다는 웅변이 먼저였고, 학교 납부금을 뒤늦게 낼지라도 웅변학원비만은 제 날짜를 어기지 않았습니다. 점점 웅변에 매료가 되어갔고 실력도 일취월장 했습니다. 학교 대표로, 순천대표로, 전남 대표로, 나중에는 고등학생 중에는 전국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순천 검둥이가 웅변대회에 출전했다는 소리만 듣고도 다른 연사들이 기권을 하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웅변 장학생으로 납부금도 면제가 됐고, 웅변부장을 맡아 50명이 넘는 후배부원들과 함께 순천 매산고등학교 웅변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각종 궐기 대회, 규탄 대회가 많았는데 그럴때면 규탄사나 선동 구호를 도맡아 외치기도 했습니다. 대학 예비 고사에서 서울과 경남 지역에 합격이 되었는데도 집안 형편상 대학 진학을 만류하시는 부모님의 뜻을 쫓아 학업을 포기 하고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군대시절

1976년 2월 광주 31사단 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2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진눈개비가 날리는 눈물고개에서... 교육장을 오가는 길바닥 얼음 위에서... 연병장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좌로굴러, 우로 굴러,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낮은 포복을 원없이 하고 나면 훈련복이 이순신 장군 갑옷이 되곤 했습니다. 광주 훈련소를 마치고 춘천 101 보충대를 거쳐 양구 2사단(노도부대)에 배속 됐습니다. 2사단에서,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수료 할때는 수료생을 대표해 사단장님께 신고를 했습니다. 전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완전한 군인이 되어 사단수색대(일명 육군 스키부대)로 전출이 됐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전방사단 수색대, 대한민국에 하나 밖에 없는 육군스키부대. 6.25 전쟁 중에 사단기를 적군에게 빼앗겨 버린 교육전투사단 수색대 생활은 오히려 신병교육대 생활이 그리울만큼 혹독했습니다. 인민군 복장에 북괴군 AK소총을 들고 뛰고 달리는 자대 생활은 인내의 한계를 시험케 했습니다. 힘든 훈련속에서도 부대 대표로, 사단대표, 군단대표로 각종 웅변대회에 출전했으며 그 때마다 좋은 성적으로 우승해 포상휴가도 많이 받았습니다. 판문점 미루나무 도끼사건, 공수 지상훈련과 진부령 스키장에서 처음 배운 스키도 젊은 날의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청·장년시절

1978년 12월 달에 전역하고 79년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초창기 서울 생활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건축 현장에서 모래, 자갈을 져올리는 노가다판에서 부터 책세일, 보험세일, 잡지사 기자, 대천해수욕장 튜브 장사 등을 거쳐 학원강사로 있던 80년 3월 보광동에서 학생 7명이 있는 학원을 인수해 교육 사업을 시작하면서 용산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성실하게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원생들이 늘어가고 81년에는 결혼도 했습니다. 81년에 큰아이(기호), 83년에 둘재아이(기욱)가 태어 나면서 차츰 가정도 안정돼 가기 시작했고, 지역에서 방범 자문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맡아 봉사활동을 하면서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웅변협회에서는 용산지부장, 서울본부 부본부장 등을 거쳐 전국조직을 총괄하는 사무총장도 역임했습니다. 야당의 당원으로 공안정국, 군사 정권에 맞서는 시위에 참여해 최루탄 가스도 많이 마셨고, 87년 대선 때에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 중앙 유세위원이 되어 경남, 진주, 삼천포, 사천 지역을 담당 했습니다. 91년 지방자치 선거가 부활되고, 평민당 용산 지구당 조직 부장을 맡고 있던 저는 용산구의원 선거에 출마해 최연소로 당선이 됐습니다. 95년 제 2대 구의원 선거에서는 최다득표로 용산구 의원에 재선이 되었으며 총무·재무분과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97년 대선 때는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본부 용산 지구당 유세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98년 용산 구청장 선거 때는 수도권에서 제일 젊은 구청장으로 그것도 전국 최초로 구의원에서 구청장에 당선되는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청장 재임시절에는 억눌리고 가난한 보통 시민들의 청장이 되고자 노력했고, 미 8군 영내에 불법으로 건축중인 호텔(방97개) 건립을 저지하기 위해 온 몸으로 맞서기도 했습니다. 군사목적으로 무상 양여 받은 이태원 아리랑 택시 부지를, 택시회사에 연간 약 2억이나 되는 임대료를 받고 빌려주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미군 측과 반환 협상을(소파의제로 채택) 시작해 결국 2002년에는 우리구에 반환 되어 그 자리에 후임 구청장께서 종합행정타운을 건설하였습니다.

구청장에 재직한지 2년만에 선거가 있기 한달 전 순복음 교회가 발행하는 국민 일보 용산구 후원회장 취임축하 예배를 드린 후 목사님과 장로님, 관내 6명 국민일보 지국장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저녁 식사 값 44만원을 지출한 것이 선거법에 위반되어 벌금 100만원을 선고 받고 청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주경야독

가정형편으로 중단한 공부가 하고 싶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버지 대학 나왔느냐고 묻는 말에 거짓말로 대답할 수 없어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낮에는 학원을 하면서 의정활동에다 주민들 민원에 매달리고 밤에는 안양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힘든 것 만큼 보람도 있었지만, 솔직히 생을 통해 가장 정신없이 살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대학 졸업후 곧바로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북한학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속담에,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밤 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요? 내친 걸음에 그리고 이왕에 시작한 공부이니 끝을 보겠다는 심정으로 단국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소파 개정에 관한 논문이 통과되어, 정식으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단국대학교에서 약 5년간 "지방자치 이론과 실제" 란 과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2년간 구청장을 역임하고 철저한 야인이 되어 살아온 10년 세월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습니다. 속담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찾아와도 정승이 죽으면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 왔습니다. 배가 고팠던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쓰라린 좌절 뒤에 따뜻한 위로 한 마디에도 눈물나게 감사해했던 날들이 있었기에 내일은 모두를 위해 더욱 진솔하게, 사심없이, 열심히 살아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그리고 용산을 위해 많은 것을 고민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지난 시절이 오히려 저에게는 더 괴로웠습니다.


민선 5기 구청장으로 돌아오다

2010년, 드디어 저에게 다시 기회가 왔습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민선 5기 용산구청장으로 당선된 것입니다. 지난 10년을 거울삼아 더 힘찬 열정과 희망을 안고 민선 5기 구청장으로서  “새 시대, 새로운 행정을 펼쳐 위대한 용산시대를 건설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민선 5기 용산구청장으로서 삶에 지친 우리 구민들에게 서로를 안아줄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선물하고 싶었고 나아가서 인정 넘치는 용산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민선 5기 구정은 다른 무엇보다도 구민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하였습니다. 구정의 주체인 구민들로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보다는 현장으로 나가서 현실에 맞는 행정을 펼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용산에 사는 아이들이 대한민국을 이끄는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마음껏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고, 지금의 용산이 있기까지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리며 고스란히 젊은 시절을 보내신 어르신들을 위해서 노인복지시설과 요양시설을 확충하였습니다. 그동안의 급속한 개발 과정에서 지치고 갈라진 구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보듬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지난 4년간 우리 용산에서만큼은 불필요한 갈등과 반목으로 인해 발목을 잡는 사례가 한 건도 없었다고 자부합니다. 우리 용산은 여당, 야당도 없고 지역간, 세대간 갈등도 없이 오로지 용산 발전을 위해 마음을 모아왔습니다. 그 결과 지난 4년의 노력은 구민 행복지수 1위라는 보답으로 돌아왔으며 그 어떤 일도 어떤 역경도 구민 여러분들과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4년이 참으로 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용산 가족들을 위해 일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고 저와 용산가족들이 함께 꿈꾸는 용산의 모습을 만들어가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선 6기 구청장으로 다시 출마하게 됐습니다. 저는 이번 민선 6기 선거를 준비하며 “행복한 용산시대”를 캐치프레이즈로 삼았습니다. 제가 지난 4년 동안 구민들을 만나면서 우리 용산 가족들이 진정 바라는 삶은 하루하루 행복한 일상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많은 구민들께서 용산을 잘 알고 있는 저의 진심을 믿고 다시 한 번 저를 선택해주셨습니다. 이번 선거 기간을 거치며 저는 아직도 제 발길이 닿지 않았던 곳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무엇보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구민의 바램을 이루고 싶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용산의 발전만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민선 6기 용산은 용산 가족 모두의 행복을 위해 구민을 최우선으로 하는 행정을 펼철 것입니다. 소통과 화합, 통합만이 용산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길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용산 가족 모두의 행복을 위해 구민을 최우선으로 하는 행정을 펼치겠습니다. 용산구민의 행복지수가 서울시 1위를 넘어 대한민국 1위가 될 수 있도록 굵직굵직한 지역 현안부터 작은 일까지도 열심히 하는 구청장이 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드립니다.